
부처의 이름에 속지 말 것
읽는 중에는 진리를 찾으려 하지 말고, 사유하는 과정에 집중하자
읽기전
부처의 내면을 지닌 자의 성장소설?
무슨 책을 고를지 살펴보다 추천 받은 책. 호기심이 생긴 이유는 단순했다.
제목부터 부처의 사항을 다룰 것이 예상되었는데, 저자는 저 먼 외국의 헤르만 헤세였다.
먼저 서양의 작가가 동양의 철학을 다룬다는 것도 신기했고
우리에게 데미안으로 익숙한 헤르만 헤세라면
단순한 철학서가 아닌, 그의 사상을 지닌 소년의 성장스토리를 그려내지 않았을까 ? 라는 기대감을 들게 하였다.
읽으면서
이것은 위인전인가? 라는 의문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의 어렸을때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어렸을때부터 모든것을 갖추고, 어른들과 비교해도 뛰어난 식견을 지녔던 싯다르타.
그렇지만 누구보다 내면의 갈증을 느껴하며 고뇌하는 사람이다.
"리아, 노암, 핀" 등의 서구권에서 태어난 아이의 소설을 예측했던 나는, 당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는 내가 아는 부처의 환경, 행보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 귀족의 자식, 출가 등 )
내 뜻대로 흘러가는 책이 몇이나 있겠는가 하며 이내 받아들이며 보기로 했다.
부처의 행적이나 불교의 교리를 기반으로, 부처가 어떤 생각을 해왔으며
어떤 과정에서 열반에 이르는지에 대한 종교서적 쪽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초반부까지 그러하였다.
자아를 버림으로써 아무것도 없을수도, 무엇이든 될수도 있는 경지를 추구하는 구도자.
부처의 삶을 상상하며 읽어도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그렇지만 고타마 라는 성인의 등장으로 머릿속에는 물음표로 가득하였다.
고타마도 부처로 알고있었는데?? 부처의 원래 이름인 고타마 싯다르타에서 따온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정답이라 생각했던, 부처의 삶은 싯다르타가 아니었나 하는 의문으로 계속 읽게 되었다.
그럴만 한 것이, 고타마라는 인물은 실제 부처의 상징인 보리수 밑에서 열반을 한 상황이었다.
반면 싯다르타는 무엇이 진리인줄 모르고, 깨닫는 방법조차 몰라서 찾고있는 사문에 가까운 상태였다.
고타마는 정답같은 존재. 즉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를 의인화 한 것이고
싯다르타는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부처, 불교에대한 해석을 나타내는 인물이 아닐까? 라는 생각으로 읽게 되었다.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 기록
보통 소설의 기본은 발단 - 전개 - 위기 - 절정 단계로 알고있고, 대부분 인물간 혹은 환경적 요인으로 갈등이 심화된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조금 다른점이 있다.
싯다르타의 내면적 갈등에 의해서 진행되고, 이것만이 조명된다.
작중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브라만인 아버지부터, 친구이자 추종자인 고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사문들과, 성인 고타마.
기생 카밀라, 상인 카마스바미.
현자 바수데바와 자신의 아들까지.
그치만 이들에 대한 비중이나 묘사는, 엑스트라 정도이다.
물론 책에는 주인공이 있고 조명이 향하는게 맞긴 하지만
이 책에서 이들의 비중은 그저 싯다르타의 행보상 존재했던 인물들 정도이다.
진리로 표현되는 고타마도 스쳐가는 인물 정도이고
현자로 여겨지는 뱃사공 바수데바도 깨달음을 주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그외의 수많은 페이지들은, 모두 싯다르타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생각들로 이루어진다.
의도적이라 표현할 만큼 독백과 사색에 대한 내용이 많다.
내면의 순수한 소리인 '옴'을 신성시 표현하는것도 그렇고,
외부에 실존하는 모든것들에 대해서는 수련에 방해되는것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읽고나서
작가의 의도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바는 무엇일까. 제목도 그렇고 마치 부처의 생애를 기록한듯한 책이다.
그렇다면 자서전으로 읽어야할까? 마치 부처의 정보를 모아 생각과 행동을 재현했다고도 볼 수 있는 책이다.
아니면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기위한 소설속 주인공 정도로 봐야할까?
난 읽을수록 후자로 생각하게 되었다.
데미안을 읽은 상태여서 그런가, 내면의 성장이나 철학에 대해 얘기하고자 하는 작가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중반부에 실제 부처로 대표되는 인물인 고타마가 등장하면서
불교 사상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자, 싯다르타라는 제목을 쓰지 않았을까 싶었다.
흥미를 유발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몰입하기 위한 장치정도로 생각되었다.
그러면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깨달음은 무엇이었을까.
마지막에 노인이 되어 나눈 고빈다와의 대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은 어린애들은 모두 내면에 이미 백발의 노인을 지니고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도 모두 내면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과거의 존재하였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미래에 존재할 모든 생명을 동시적인 것으로 볼 수 있어.
모든것이 선하고, 완전하고, 바라문이야.
모든것에는 부처가 있고, 이를 존중하게되면 돌멩이조차 사랑하게 된다.
돌멩이는 돌멩이지만, 짐승이기도 하며, 신이나 부처이기도 하다.
이를 인지하고 바라보면 구멍 하나하나와 빛깔, 단단함 그 모든것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옴을 발하고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누구나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라는 말이 아닐까?
후반부에 자주 등장하는, 싯다르타를 깨달음에 이르게 한 강에서도 느낄 수 있다.
싯다르타는 강에서 원하는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강이 내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있었을 뿐이다.
강은 고요함의 소리도, 슬픔의 소리도, 격렬한 분노의 소리도 모두 담겨있었다.
자연은 그저 자체로 존재할뿐, 우리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싯다르타는 그저 받아들이고, 그 모든 존재의 가능성을 인지하였을 뿐이다.
마치면서
이 책의 재밌었던 점은, 읽기만 해도 싯다르타의 사유하는 경험을 나눠 받았기 때문이다.
생각하는 태도가 달라지면서 나도 모르게 깨달음을 얻을 듯한 느낌이 너무 좋았다.
그렇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모든것들이 진리일까? 라는 거에는 반대다.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반대하는게 아니라, 작가도 원하지 않을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책에서 나온 얘기들은 싯다르타, 작가인 헤르만 헤세의 생각끝에 나온 주제들이다.
부처는 그저 몰입하기 위한 장치일뿐, 명성에 의해 진리처럼 받아들이기만 하기에는 아쉬운 책이다.
과정과 태도를 배워, 나만의 진리를 찾아낸다면
이 책을 더 알차게 읽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무리한다.